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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아파트백업

도플갱어

 

 

한 여름의 뙤약볕이 내려쬐는 교정의 벤치에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하복을 입고 입에는 하드 막대를 하나씩 입에 문 남녀가 앉아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늘도 들어갈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는 그들이 어떻게 보면 무식해보이기도 했다. 

 

"만약에 말야."

 

줄줄 흐르는 하드에 혀를 낼름낼름 핥아먹으며 작은 입이 새부리처럼 조잘댔다.

 

"지금도 날 알아볼까?"

 

뜬금없는 소리에 핀잔이 날아올 법도 한데 나란히 앉아있는 소년은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질문이 전부인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녹은 하드 막대에서 끈적한 단물이 교정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이게 이렇게 고민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하기사 벌써 몇년 전 일이야. 그때는 되도 지금은 안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다. 점점 심각해지다 못해 앓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다 얼버부리려 팔을 들었을 때다.

 

"만약 그 말이 지금도 널 알아챌 수 있냐는 뜻이라면."

 

언짢은 것 같기도 하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하던 표정이 싱글싱글 웃으며 사람을 열받게 하는 능글맞은 여유로 변해 있었다. 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대체 뭘까.

 

"한번 시험해 볼래?"

 

소년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각자 벤치 끝에 앉아있었는데 소년의 팔은 소녀의 등 뒤의 등받이를 잡고 있었고 소녀는 벼랑 끝에 걸려있다. 밀쳐내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어느 새 그 얼굴이 바로 코 앞까지 와 있다.

 

"시, 시험? 무슨 시험? 아! 중간고사 만으로 난 충, 악!"

 

싱글싱글 웃으며 사람 약올리더니 이 음흉능글왕자가 코를 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코를 물렸다는 사실에 성을 냈지만 사실 이마까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더 방방 뛰었다. 소년은 매우 능숙하게 소녀의 주먹질을 피해 달아났다.

 

"언제든지 시험해봐도 좋아. 지금이라도 당장 해볼래?"

"됐거든!"

 

심통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리는 소녀의 뒷목이 붉어졌다. 소년의 눈빛이 살짝 탁해졌다가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 번에 알아볼거야,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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