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빼빼로데이 기념글
* 약간의 유혈 및 상처 묘사
* 귀신 유령 퇴마묘사
* 초딩은 아니지만 성인도 아님. 그 중간 어디쯤.
사람들로 가득찬 교차로는 언제나 그렇듯 북적였다. 목적지는 달라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신호대기 중에 사람들 사이에 멈춰서자 어디선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예리하게 벼려져 있는 감각이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다. 대각선으로 세 사람 건너에 서 있는 인디핑크의 투피스를 입은 여자에게 매의 눈이 꽂혔다. 아닐 거라는 가정을 하면서도 좀처럼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노려보고 있노라니 주위 파처럼 꽂혀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가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길을 가다 영가를 마주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자연사의 경우에는 자신이 죽은 줄 몰라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활동하는데 저승에서 마중 온 이들과 마주하고 원혼임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영가 중 하나겠거니 생각하려고 했지만 하루종일 그 옷 색깔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경고음을 울리는 것처럼.
"강림아."
깡총깡총 걸어오는 움직임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리던 길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고양이 털처럼 아래로 축 처졌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무섭게 노려보던 소년은 시선을 느끼고 바로 눈을 돌렸다.
눈웃음을 지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해보지만 이미 상대방이 다 본 뒤였다.
"무슨 일 있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소중한 이에게 괜한 걱정을 하게 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하지만...."
"요즘 제대로 못 잤더니...."
"뭐?!"
이크, 말실수했다. 무서운 추궁이 이어졌다. 당황해서 생각해두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다보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 그걸로 또 한참 추궁을 당했다.
"최강림 이 병신."
길길이 날뛰는 여자친구를 겨우겨우 달래며 스스로에게 욕지꺼리를 퍼부었다. 욕 먹어도 싸다, 멍청한 최강림.
*
하늘이 이렇게 파랗구나. 한낮에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란 잘 없으니까. 뺨 감싸는 온기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안도하길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진짜 멍청해 보이겠다.
시야 안으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따라붙는 포니테일이 보였다.
"어때, 좀 괜찮아?"
"응."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지만 금방 잡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하리야. 정말 괜찮아."
"괜찮기는. 자기한테 있었던 일도 기억 못하면서 ."
토라진 하리가 콧김을 뿜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제와서 사실대로 말하면 그건 그거대로 걱정할테고.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그런 걸로 두자고 생각했다. 강림은 나즈막이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뺐다.
뻣뻣했던 뒷목에 폭신하고 따뜻한 것이 닿아 보드랍게 감쌌다. 목침으로 딱 안성맞춤인 높이였다. 좋다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러고보니 여기가 어디더라.
현재 위치, 학교 뒷뜰 화단 앞 벤치의 하리 무릎 위.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강림아? 어? 왜 그래? 뭐야, 아까보다 더 심해졌잖아. 괜찮아?"
죽어가는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아무래도 학교는 결석해야겠다.
*
"구하리. 아무리 공컾이라고 해도 때와 장소는 가....릴 필요가 없지요. 암."
이글이글 불타오는 눈에 그 뒤로 피어오르는 새카만 오라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누가 감히 구하리에게 개길 수 있을까. 앞에서 구하리 까면 뒤에서 진흑막에게 척결 당하는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삐죽대는 걸 보니 현우는 그저 샌드백이었던 모양이다. 누가 하리를 빡치게 한 걸까. 보통인간이라면 체육매트에 말려서 옥상 낙하 처벌을 당하고 하리는 매우 개운한 상태일테니 우리학교 학생은 아니다. 피해자는 아무도 없는데 구하리만 열받은 상태라면, 상대는....
"강림이랑 싸웠어?"
물음표가 붙음과 동시에 하리의 교과서가 현우의 머리에 꽂혔다.
"왜 다들 피하는 길을 선택하는지 모르겠네."
"미리 말 좀 해주지."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대. 그래도 사람인데 이쯤되면 스스로 알아야지."
가은이는 더 객관적이고 냉정해졌다. 맞는 말이라 현우는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현우가 애처롭게 가은에게 징징대는 사이 하리는 혼자 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
강림이도 중요한 게 맞지만 지금은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모든 학교의 여학생이 다 모여있는 것 같다.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천하의 하리도 겁이 났다. 포기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저보다 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가은에 하리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래.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다. 각오를 다진 하리가 가은이와 혼돈의 카오스 속으로 뛰어 들었다.
역시 세상은 마음 먹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한번 배웠다. 풀이 죽은 두 사람이 저마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 어쩌지."
"내일 한번 더 가봐야지."
"어? 나 내일 야자 있어. 가은이 넌 야자 안하지?"
"응.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 주셔."
".....어....부......난 어떡하지."
야자도 안해서 부러운데 사러갈 시간도 있고. 야자 끝나면 상점은 다 문 닫았을 시간이고 낮에는 학교라 사러 갈 시간도 없다.
땅이 꺼질 듯 날숨을 길게 내쉬던 하리가 가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가은아."
"응. 하리 네 것까지 사올게."
가은이 빙긋 웃었다. 역시 이가은! 이가은 최고! 하리가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
묘하게 들뜬 분위기 탓일까. 평소와 똑같은 하루인데 하나같이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더 압박하고 재제했다. 학교에 음식물 반입 금지라는데 정작 학교 안에 팔지 않나? 매점에 빼빼로 팔던데. 그건 되고 사서 가져오는 건 안되고? 정글고 정안봉도 아니고 이건 무슨 행패래.
결국 빼빼로도 못샀다. 사러 갈 시간도 없고 매점 빼빼로는 정가보다 1.5배나 비쌌다. 의지했던 가은이도 실패하고 직접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평일은 야자고 똥손에 망손인 하리가 혼자 만들 수 있을까. 부엌이 폭파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하하...."
현관문을 등지고 삐쩍 마른 웃음를 내는 하리를 보고 두리가 경악했다. 한밤중에 그러고 서 있지 말라며 불같이 화냈다.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인남과 두리는 잘 생각이 없어보였다. 씻고 나온 하리가 목에 수건을 걸고서 소파 아래 쪼르르 앉아 TV에 푹 빠진 부자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엄마 없다고 너무 늦게 자는 거 아냐?"
"요고만 보고."
"응응."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성의 없이 대답만 하는 모습에 하리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꼴보기 싫어 방으로 들어가려데 TV속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전자 A씨의 졸음운전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져....]
영상 속 사고장소를 보니 바로 이 근처였다. 요즘들어 잦아진 지미의 밤샘근무의 원인이 바로 저거였나 보다.
그날 밤, 하리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자가다 깨어나도 꿈인. 영원히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꿈을.
악몽 때문에 잠을 설쳤으니 제대로 잤을리가 없었다. 눈 밑에 새카만 그림자를 달고 초췌한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야, 하리야. 몰골이 그게 뭐냐?"
"말도 마. 밤새 악몽꿨어."
"그럼 강림이한테 부적이라도 하나 써 달라고 하지 그래."
"야. 부적 하나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가는지 아냐?"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하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고 으르릉거렸다. 뭐 잘 모르지만 하리가 그렇다니까 현우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많은 과자가 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조용히 관전하던 가은이 뜬금없이 화제를 꺼냈다.
"맞아. 마트에 있는 빼빼로 전부 망가지거나 없어졌대. 벌써 몇군데나 털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렇게 미어터진 거였나. 하리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살짝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거 며칠되지 않았어?"
"응. 아마 지난주 부터였던 거 같아. 그냥 사회부적응자나 분노조절장애 있는 사람이 저지른 짓인가 했는데 그런 건 또 아닌가봐. 실은 말야. 사람이 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어. CCTV는 미공개지만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뭔가 움직임이 변칙적이고 기이했대.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거지."
"네 말은... 귀신이다?"
"이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고."
"그런 부정확한 이야기를 막 뿌리고 다녀도 되냐?"
"어디까지나 썰이야."
"사상자는 없어서 다행이지만 벌써 몇 군데라면 문제가 심각한 거 아닌가? 동네 마트도 아니고 보안이 철저한 대형마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그 점은 능력좋은 우리나라 경찰이 해결해줄거야."
실컷 분위기 잡더니 결국 남에게 떠넘기기로 끝이 났다. 하리과 가은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우쭐해진 현우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
10시 59분. 지금까지 모은 정보에 의하면 마트가 습격당한 시간이 모두 11시로, 그 1, 2분 전에 CCTV가 망가지거나 오류가 일어나 녹화 중지가 됐다. 지금까지 급격을 받지 않은 마트는 K마트 뿐. 특정 과자만 노린 걸로 봐서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숨을 죽이고 K마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마트 입구 앞에서 멈췄다. 보안시스템까지 작동 중인데 어떻게 내부로 들어가려는 걸까. 하지만 상대는 아주 쉽게 장비를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왜 하필 빼빼로일까. 왜 빼빼로를 탐내는 걸까. 건물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무슨 주술을 부리기라도 한건지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하고 곧바로 마트로 날아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빠르기였다. 순식간이면서 가벼운 몸짓으로 마트에 들어온 그는 어둠속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가게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소리를 죽일 필요없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여자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과자가 정리되어 있는 진열장을 깨부수고 있었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씩씩대며 발밑에 떨어진 과자를 밟고 찌그러트리며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달렸다. 여자가 들고 있는 과자는 소문대로 초코막대 과자였다. 다른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오직 막대 과자가 올려진 진열장만 망가뜨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품안에 손을 넣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이 얇고 불투명한 노란 종이를 품안에서 꺼냈다. 빙의인지 발작인지 일단 움직임을 봉해야 한다. 부적의 기운을 느낀건지 날뛰던 여자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눈이 뒤집히는 건 빙의에서 자주 나타나는 장면이었지만 줄줄줄 흐르는 눈물이라던지 중얼거리는 말의 빠르기라던지 그 해괴함은 그간 수 많은 귀신을 퇴치한 강림이도 흠칫하게 했다. 입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집중해서 들어보니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거였다.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가야 해.
"으읏!"
귀신보다는 요괴 같았고 그거보다 더 기괴했다. 차라리 피투성이 악령이 나을 지경이었다. 중얼거리며 강림을 지그시 바라보던 여자가 갑자기 강림에게 달려들었다. 부적을 던지고 공격을 하고 그럴 정신이 없었다. 재빨리 회피했다. 여자는 성난 황소처럼 맹렬하게 뛰어 그대로 마트를 뛰쳐나갔다.
방금 뭘 본거지. 분명한 건 저 여자가 이 소동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
학교가 뒤숭숭했다. 어제 또 마트가 습격당했고 이제 범인의 목표가 분명해졌다. 피해입은 마트들은 해당 제품을 취급하지 않겠다는 안내문을 붙였고 습격당하지 않은 가게들도 앞다투어 물건을 상품을 치웠다. 그래서 빼빼로 구하기가 크리스마스 선물 사는 것보다 어려워졌다. 도대체 이 초코 묻는 과자가 뭐라고 범인은 이거만 노릴까. 혹시 과자를 만든 회사에 앙심을 품은 사람인가. 그렇다기엔 초코 묻은 막대 과자라면 다 포함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도대체 범인은 왜 한낱 과자에 집착하냐고.
"사람이야.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야."
"그건 또 무슨 어려운 소리야. 알기 쉽게 설명 해 줘."
현우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애절하게 말했다.
"빙의된 거 같아."
"빙의라면 귀신에 씌인 거지?"
"응. 아주 강한 원한이 느껴졌어. 보통 강한 원혼이 아니야. 이미 그 여자의 의식은 원혼에게 먹혔을거야. 빨리 퇴치 하지 않으면 악령으로 변해."
"아, 악령?!"
강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악령이 되면 어떻게 돼?"
"죽어."
짧고 강력한 대답에 하리가 마른 침을 삼켰다. 많은 말이 생략됐음에도 충분히 이해됐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돼?"
"귀신을 불러내야지. 하지만 귀신이 노리는 물건은 이미..."
모든 마트에서 초코 막대 과자를 치웠다. 당장 구할 방법이 없는 상태. 모두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가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구해올게."
"진짜? 하지만 가은아."
"괜찮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압박이 느껴졌다. 가은은 밝게 웃으며 단호하게 말을 막았다. 그렇기에 하리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더는 말 할 수가 없었다. 빙의된 여자를 불러내기 위한 회의는 이후로도 이어졌다.
가야 해. 빨리 가야 해. _가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누가? 빨리 가야 해. 누가 기다려? 기다리고 있어. 기다려? 누구? 누구지....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뛰어가는 뒷모습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벌써 약속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났어. 오늘 분명 약속있다고 칼퇴 한다고 말했는데 그 대머리 독수리가 퇴근시간 30분 전에 일거리를 주고 다 해놓고 퇴근하라고 하질 않나. 그러니까 머리에 고속도로가 생길 때까지 모쏠인거야.
허겁지겁 달리는 와중에도 웃음이 밀려나왔다. 거친 숨소리 중간중간 킬킬거림이 섞였다. 그런 걸음을 잡아드는 것이 있었다. 상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에 홀린 듯이 멈춰섰다. 유리벽면을 가득 메운 전단지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하. 오늘이 그 날이야? 바쁘게 산다고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여기서 조금 더 늦어도. 이거 주면 좋아하긴 하겠지? 가게에 들어가 과대포장이라고 할만한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나왔다. 이제 모퉁이를 돌아 길만 건너면 된다. 다급함이, 초조함이 해선 안 될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차 안 오지? 그래선 안됐다. 급해도 기다렸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커다한 출동음이 연달아 터졌다. 이제 초록불로 바뀐 횡단보도가 불게 물들어갔다.
........야 해.
_에게 줘야 해.
어서 가야 해.
_가 기다려.
산발한 머리와 너덜너덜한 행색에 여기저기 찢기고 긁힌 상처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정처없이 떠돌았다. 지나간 길 위에 끈적이는 검붉은 액체가 도장처럼 꾹꾹 찍혀있다. 풍기는 악취는 왕복 4차선 교차를 사이에 두고도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사람이야?"
이제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걸어다니는 송장이었다.
"큰일이다."
강림이 검을 뽑아들었다. 검이 불타올랐다. 강림이 빠르게 파고들어 검에 붙은 불을 여자에게 던졌다. 하지만 여자가 내지른 괴성에 불이 튕겨나갔다.
"....가야 해... 방해하지마!!!"
악다구니를 써대며 강림에게 달려들렸다. 힘이 어찌나 센지 막아내는 것도 겨우였다.
"크...크윽."
"강림아! 오..오지마! 위험...해."
간신히 여자를 밀쳐냈지만 뒤로 조금 밀려난 게 다였다. 강림이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무턱대고 공격했다가 다칠 수도 있다. 이게 매우 어렵게 됐다.
"근데 아까부터 어디를 가야 한다는 거야? 그곳에 데려다 주면 한이 풀리지 않을까?"
제법 그럴 듯 한 말이었다. 저 여자의 몸에 빙의된 영가는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려고 해도 상대가 저 모양이어선.
강림이 손가락을 세우고 눈을 감았다. 무어라 주문을 읊었다. 어디서 날아온 종이가 강림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졌다.
"파(破)!"
부적이 작은 빛가루가 되서 흩어지자 여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공격당한 듯 앞으로 꼬꾸러졌다. 충격이 상당한 듯 여자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빙의된 귀신의 원한이 너무 강했나. 하리가 읽으려 하지도 않았는데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까뒤집힌 눈이 하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오늘? 네! 시간되죠. 7시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때 뵐게요.
-조금 있으면 퇴근이네.
-김대리! 이거 좀 처리 해.
-네? 시간이....
-시간이 뭐? 일은 다 해야 퇴근하지. 이거 끝내고 퇴근 해.
-여보세요? 제가 오늘 잔업이... 정말요?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시는 게... 저야 꼭 뵙고 싶죠. 네.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빨리 처리하고 갈게요.
-휴. 겨우 다 했네. 이런 시간이 벌써.... 피드백은 내일 받으면 되고. 빨리 가야겠다.
-헉, 헉, 헉, 헉. 택시 탈 걸. 힘들어 죽겠네. 어디에 있는다고 했더라. 어? 오늘이 빼빼로 데이야? 주면 좋아하겠지? 늦은 거 좀 봐줄지도 모르고. 아! 빨리가야지.
-아! 급한데. 신호가... 보자. 오는 차 없지? 어.....?
하리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다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참혹한 광경이었다. 뼈가 다 으스러지고서도 한동안 의식 있어 하리는 그 고통마저 고스란히 느꼈다.
-....어서 가야 하는데....기...다리 ..고 있.....는.....
전하지 못한 마음이 하리의 안에서 차올랐다. 눈에서 흐른 액체로 뺨이 뜨겁게 데워졌다. 엿본 기억 속에 여자가 바로 빙의되어 정신을 놓고 지금까지 수많은 마트를 습격하고 강림이를 공격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존재였다. 외모는 많이 일그러졌지만 틀림없이 같은 인물이었다.
"전하지 못했어. 그래서 미련이 남은 거야."
"하리야! 조심해! 귀신의 기척이 사라졌어."
"뭐?"
"녀석은 이미 저 여자를 떠났어."
"그럼...."
귀신이 떠났다는데도 여자는 좀전과 달라진 점이 없어보였다.
"귀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아서 그래. 원혼은 지금 저기에 없어. 거기서 움직이지마."
손가락을 세우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하리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만들어졌다. 강림이 손가락을 내리고 주위를 경계하기 무섭게 수풀 속에서 눈이 있던 자리에 구멍이 뻥 뚫린 혼령이 튀어나왔다. 강림과 원혼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야....돼....가야 돼애애!!!
"으윽....!"
"강림아!"
"원한이 너무 강해...이러다간....윽!"
-방해하지마!!
필사적으로 막아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점점 몸이 뒤로 밀리고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원혼이 손끝에서 긴 손톱을 꺼내들었다. 강림이 원혼을 막으라 양손이 묶여 다른 방어를 하지 못하는 약점을 이용해 긴 손톱으로 강림을 공격했다.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조금 상처를 입고 말았다. 손톱에 찢겨져 나간 옷 틈새로 피가 스며나왔다. 치명상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상처에 주입된 원혼의 사념이 독처럼 몸에 퍼지기 시작해 강림은 몸을 가누기 힘들어졌다.
"강림아!"
"안....돼!"
다친 강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하리가 결계를 빠져나왔다.
"무슨 짓이야! 위험하게!"
"위험한 건 너야! 봐! 이렇게 다쳐놓고는!"
급기야 하리가 강림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고 강림이는 혼비백산했다.
"구하리! 너 지금 무슨...."
"조용히 해. 어떡해. 독이 퍼지기 시작했어."
"...어, 자잠만!!"
강림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하리는 너덜해진 셔츠 자락을 꼭 쥐고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림이 머리 위로 희미한 영체 같은 것이 빠져 나올락말락 했다. 날아갈 것 같은 의식을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엉겨붙어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원혼의 텅 빈 눈구멍에 들어왔다.
-.....씨.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꼭 말하고 싶었는데...
한창 실랑이를 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원혼에게 눈을 돌렸다. 비쩍 마른 원혼의 얼굴에 있는 커다란 구멍에서 굵은 액체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보고 싶었어요. 꼭 보고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_씨를 꼭 만나고 싶었어요. 전해주고 싶었는데.
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원혼에게 다가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원혼은 하리가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최선을 다했을텐데. 그렇죠? 전해주고 싶은 게 있는 거죠? 그래서 찾고 있었던 거고. 저기. 저 분 아녜요?"
하리그 가르킨 곳에 어떤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발바닥은 다 까져 피딱지와 오물로 엉망진창이었고 몰골도 거지꼴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봤다. 원혼의 까만 동공에 천천히 눈이 차올랐다. 비쩍 마르고 흉하게 일그러진 형체가 점점 생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내가 무슨 짓을.....
"괜찮을 거에요. 아니, 괜찮아요. 죽기 직전에 만나려고 했던 사람 맞죠?"
-네... 하지만 이런 짓을 저지른 저를 미워할거에요. 분명히 날 싫어할 게 분명해요!
"진정하세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우리? 이렇게 구르고 다쳤는데 수습까지 해야 해? 강림이 눈을 크게 키웠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표정이었다.
-....줄 게 있었어요. 별 거 아니지만.
"별 거 인 게 어딨어요. 마음을 담은 선물은 그게 무엇이든 소중한 거에요."
-그럴까요?
절망으로 가득하던 영가의 얼굴이 희망으로 살짝 펴졌다.
"전해주고 싶었던 게 뭐였어요?"
-....어...그게 뭐더라.
영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리는 그가 떠올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눈을 끔벅이며 한참을 멍하게 있던 영가가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나랑 진지하게 만나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했어요. 야근 때문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이걸 주고 우리 사겨보자고. 그러려고 했어요.
뭘 주려고 했더라. 교차로에 서기 전 편의점을 들렸고 거기서 뭘 들고 나왔는데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소리와 화려하게 꾸며진 바구니, 그안에 담겨있는 종이상자들.
-너무 늦었겠죠?
"아니요."
-하지만 제가 전부 망가뜨려서...
"아뇨. 있어요. 꼭 있을 거에요. 찾아올테니 기다려요."
하리가 해바라지게 웃으며 뛰어가려고 할 때였다. 가은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가 다가가자 가은이 불쑥 무슨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건 가은이가 며칠에 걸쳐서 공부시간과 잠을 줄여가며 틈 날 때마다 만든 초코 막대 과자였다.
"가은아. 이건...."
"괜찮아. 어서 가져가. 이 근처에서는 안 팔아. 빨리. 저기 기다리잖아. 난 괜찮으니까. 또 만들면 돼."
힘들게 만들었을 걸 알기에 미안함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더 가은은 웃으며 하리의 등을 밀었다. 어서 전해주라고. 나는 언제나 전할 수 있으니까 라고 하면서.
하리가 가은이 만든 과자를 가지고 영가 앞에 섰다. 예쁘게 포장된 수제 빼빼로를 보자 영가의 눈이 반짝거렸다.
"전해주세요. 당신의 마음도 함께."
빼빼로를 받아든 영가가 기절한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선물을 쥐어주며 느낄 수 없는 입맞춤을 했다.
-좋아해요. 고백하고 싶었는데 이 말도 죽어서야 하게 됐네요. 내가 너무 느리죠? 당신이 계속 기다려줬는데 빨리 해야 할 때는 굼떠놓고 정작 천천히 해야할 때는 서둘렀네요. 당신이랑 행복하게 연애하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힘들게 해서요.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해요. 이건 그날 주려고 했던 거에요. 초콜릿은 기분 좋게 만든데요. 좋은 하루 보내요.
영가의 몸이 점점 흐려지더니 아침 해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쓰러진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결국 날을 꼴딱 샜다. 11월 11일이 시작됐다.
*
"여기저기 핑크핑크네. 야, 구하리. 너 빼빼로 준비했어?"
현우에게 허를 찔린 하리가 뜨끔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다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게.... 없더라고. 가은이 껀 귀신이 가져갔고."
"미리 안 산 거냐? 무슨 여자친구가 이러냐. 불쌍한 최강림. 그 흔한 막대과자고 못 받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과자잖아!"
"뭘 모르네. 연인 사이에 이벤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그러고도 여친이냐? 투투, 백일, 오백일, 1주년, 천일, 생일, 그 밖에 각종 데이. 이벤트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통달하신 분이 왜 쏠로실까?"
"아픈 데를 찌르다니. 그리고 왜 그 부분만 강조해!"
"그리고 빼빼로데이라니! 그런 건 과자회사의 상술일 게 뻔하잖아! 안 그래, 가은아?"
"제품 판매수 를 올리기 위한 홍보의 일환으로 상술에 놀아나고 있는 건 사실이지."
빼빼로를 잃은 가은은 아주 냉소적이고 염세적이었다. 때때로 무섭게 웃기도 했는데 충격이 큰 모양이다.
"오늘은 빼빼로데이가 아니라 농업인의 날이라고! 대한민국의 착실한 청소년으로서 농가의 발전과 쌀소비량 증가를 위해 자국 농산물을 이용해야 한다고! 초코발린 막대 과자말거 우리쌀로 만든 가래떡 얼마나 좋아. 이제는 가래떡을 먹어야 할 시기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맘 무슨 신의 타이밍인지 농업인의 날 기념이라고 점심에 가래떡구이가 나왔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농업인의 날 어쩌고 했으니 강림이한테는 그거 주면 되겠네. 그 신념과도 통하고 여친으로서의 도리도 다 했으니 일석이조 아님?"
아무런 악의없이 한 말이지만 어째서 이렇게 신경을 득득 긁는건지 모르겠다.
하리가 가래떡 구이가 꽂힌 나무 젓가락을 들고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현우의 등에다 욕을 퍼부었다.
"저 자식이 진짜."
현우가 달아난 방향으로 씩씩거리던 하리의 동공이 팽팽해졌다.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척없이 다가온 그가 하리의 어깨를 감싸 가슴쪽으로 당겼고 하리는 힘없이 끌려갔다. 이 모든 과정 한순간에 이뤄졌다. 하리가 서둘러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꼬챙이 꿰여있는 가래떡 구이를 크게 한입 베어물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잘 받았어."
그가 하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꼭 무슨 폭풍 같았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덩그라니 남은 하리는 허리가 뚝 끊어진 가래떡 구이를 들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
"맞아. 강림아, 너 빼빼로 받았어?"
"하리가 줬어?"
"하리 못 샀다고 발 구르지 않았나?"
"맞아. 이상한 사람이 빼빼로만 훔쳐가서 이 근처에서 빼빼로는 씨가 말랐잖아."
"그러게 미리 준비해뒀어야지. 누구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친구에게 잔뜩 눈을 흘긴 같은 반 여자애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못 받았으면 내가 줄까?"
다른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강림은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받았어."
"뭐?"
두 사람이 놀라 몸이 반쯤 앞으로 튀어나왔다.
"빼,빼로로 들고 온 거 못 봤는데...."
그게 뭐라고 말까지 꼬였다.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같은 반 여자애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어언제?"
강림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까 점심시간에."
"어? 점심시간?"
그때 구하리는 빈 손이었는데 심지어 같이 밥 먹은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빼빼로를 줬다는 거지. 도저히 모르겠다.
"급식실 앞에서 받았어."
그 민족대이동 대환장파티에서 빼빼로를?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대화를 시작한 두 사람을 두고 강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덧붙임.
"미안해요, 이안. 준비 못했어요."
이안을 위해 준비한 걸 영가에게 줘버렸다. 톡 치면 터질 것 같은 눈망울에 눈을 깜박이던 이안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가은의 뺨을 상냥하게 감쌌다.
"네가 만든 거라면 분명 아주 맛있었을 거야."
"다음에 꼭....!"
"난 너와 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해. 나에겐 아주 큰 선물이야."
"이안...."
이안의 긴 손가락이 가은의 눈밑을 쓸었다. 따뜻한 액체가 손끝에 묻어났다. 글썽이는 눈물을 닦아낸 가은이 웃음지으며 이안의 품에 안겼다. 달이 참 밝은 밤이었다.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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